시대의 선구자 맹자(孟子) - 아성(亞聖), 맹자의 출생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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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선구자 맹자(孟子) - 아성(亞聖), 맹자의 출생과 어머니

by Life K-Drama 2022.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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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 나라를 유세하고 돌아다니며, 당시 왕들에게 도덕정치(諸子百家)를 펼 것을 주장하였으나, 끝내는 아무도 채택하여 주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여 저술과 교육에 힘썼다. 제후들이 원하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외교적인 책략이었는데, 맹자가 주장한 도덕중심의 왕도(王道)정치는 당시 제후들에게는 너무 이상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도 그랬던 것처럼 공교롭게도 이렇듯 불우한 처지가 오히려 오늘날까지도 그의 사상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 아성(亞聖) 맹자

맹자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관련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교(斷機之敎)'와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더 잘 알려진 듯하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에는 시대적인 필요에 의해서 왜곡되어 잘못 알려진 면이 있다.

 

(1) 맹자의 출생

孟軻, 鄒人也. 受業子思之門人. [史記-孟子列傳]

맹가, 추인야. 수업자사지문인. [사기-맹자열전]

 

- 번역: 맹가는 추(鄒)지방 사람이다.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배웠다.

 

- 어휘 풀이:

· 孟軻(맹가): 전국시대의 유학 사상가로서 이름은 가(軻)이고, 태어난 곳은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이다.

·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 이름은 급(伋), 자사는 그의 자(字)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 해설:

  위의 내용이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나오는 맹자의 신상에 관한 내용의 전부이다. 따라서 맹자의 연대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맹자가 [진심하(盡心下)]편에서 "공자 이래로 백여 년이 흘렀다."라고 말한 대목을 가지고 추정하자면, 공자가 죽은 경왕(敬王) 41년으로부터 백 년쯤이라 가정하여 기원전 4세기쯤에 살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것 역시 맹자가 언제 말했던 것인가는 밝히고 있지 않으니 단지 추정일 따름이다.

  이렇듯 맹자는 공자보다도 약 100여 년 뒤에 살았는데도, 오히려 그의 출생과 관련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 공자의 경우 [사기(史記)]에서 공자가 상(商) 왕조를 계승한 송(宋) 나라 사람의 후예로서 고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를 모두 밝히고 있는 것에 비해서 맹자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만큼 관련 자료 등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字)에 대해서도 맹자가 자가 자여(子與), 자거(子車) 또는 자거(子居)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 역시 위진(魏晉)대 이후에 책에 보이는 것으로 확실하지 않다. 또 맹자의 출생지가 추(鄒)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노(魯) 나라의 추읍(鄒邑)으로 맹자도 [진심상(盡心上)]에서 "성인이 사시던 곳에서 이처럼 매우 가깝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성인은 곧 공자를 말하니, 노나라에서 발흥했던 공자의 유가 사상에 어려서부터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연이어 출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곳이 그 옛날 주공(周公) 단(旦)이 분봉을 받았던 곳인 만큼 주(周)대 문화의 정통을 자부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부근의 제(濟)나라 수도였던 임치(臨淄)의 서문(西門) 쪽 직하(稷下)에는 제환공(濟桓公) 시절 각지에 있는 학자들을 초빙하여 자유로이 토론하며 강의할 수 있었던 학궁(學宮)이 있었는데, 맹자 역시 이곳에서 당대의 여러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정립하였다고 한다.

 

 

(2) 맹자의 어머니는 현모양처인가?

孟母三遷之敎 / 斷機之敎 [列女傳-鄒孟軻母]

맹모삼천지교 / 단기지교 [열녀전-추맹가모]

 

- 어휘 풀이:

· 列女傳(열녀전): 한대(漢代) 유향(劉向)이 편찬한 것으로 여러 열녀(列女)의 전기를 모은 책.

 

- 해설:

  맹자를 논할 때면, 우선 어머니과 관련한 고사인 '맹모삼천지교'가 떠오르곤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냈다고 하여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열성적인 부모들의 교육열 덕인지 맹자의 어머니는 늘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오늘날도 좋은 학군을 따라서 때로는 이국 멀리 나라를 등지면서까지 죄다 한 마디씩 하기를 자식 교육 때문이라고들 한다. 이만큼 우리 사회에서 교육에 관한 열풍은 가히 식을 줄 모른다. 이것은 다 앞 정에서 거론했듯이 공자가 공부할 것을 중시했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맹모삼천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맹자네는 두 번밖에 이사하지 않는다. 장례터에서 시장으로 그리고 서당으로, 물론 세 번이든 두 번이든 자식의 교육 환경을 위해 애썼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 그 횟수야 뭐 그리 중요할 것은 없겠다.

  게다가 맹자가 살았던 서기전 300년대의 중국에서는 오늘날 우리들만큼 이사 다니는 것이 고통스럽다거나 짜증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대단한 재산을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간단한 일이 바로 이사였을 것이다. 지금 사는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무슨 이유에서든지 떠나야 한다면, 쓰던 것을 싸 가지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다 싶으면 주저앉아 살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빈 집이나 움막 같은 것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공자(孔子)가 동굴에서 태어났듯이 작은 토굴이라도 파서 살면 그만인 시대였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 환경을 고려해서 이사할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맨 처음 서당 근처로 이사래서 진작부터 맹자에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았는가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맹자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맹자네는 홀어머니가 집안 생계를 책임졌던 것 같다. 그러니 맹자네가 시장 근처로 이사한 이유는 당연히 집안의 생계 때문에 장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사는 데에 먹는 문제만큼 중대한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좋은 교육 환경을 마련해 주고자 했던 맹자의 어미는 역시 결단성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처음부터 서당 근처로 가야 맹자가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으며, 그나마 이를 깨닫고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바로 반성하여 고칠 줄 알았던 매우 과단성 있는 어머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맹자의 어머니와 관련된 고사성어 가운데, '단기지교(斷機之敎)'라는 것이 있다. 맹자가 외지로 유학을 갔다가 공부를 마치지 않고 돌아온 것을 맹자의 어머니는 보자마자 짜고 있던 베를 단칼에 베어 버렸고, 이것을 본 맹자가 이후로는 더욱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위의 이야기는 모두 유향(劉向)이 편찬한 [열녀전-추맹가모(列女傳-鄒孟軻母)]편에 나오는 것으로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유향의 이 책이 대개는 교육용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인지는 확증할 수 없다. 게다가 단기지교는 우리나라의 한석봉의 이야기와도 매우 닮은 것으로 보아 한석봉의 이야기 역시 맹모의 고사를 따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렇다면 맹자의 어머니는 현모양처라기보다는 매우 과단성 있는 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공자도 [논어-자한(子罕)]편에서 "잘못하면 고칠 것을 꺼려하지 마라/
라고 한 것처럼 누구든지 잘못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잘못한 것에 대해서 거짓으로 덮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맹자 어머니의 그런 과단성 있는 성격을 알 수 있는 고사가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는 네게 주려나 보다 라고 농담을 했다가 결국 시장에서 가서 돼지고기를 사다가 먹였다는 고사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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